며칠 전, 세상을 놀라게 한 뉴스가 있었다. 전직 교수가 자신의 재판을 담당하던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벌써 10년도 넘은 1995년에 있었던 일이 발단이다. 자세한 경과 과정은 이미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으므로 링크만 걸어둔다: 수학자는 왜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나
문제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문제지 전체를 스캔해 둔 그림도 있으나 약간 흐려서 그 부분만 따로 만들었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된 것은, 주어진 조건을 만족하려면 두 벡터 a와 b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영벡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세 벡터는 영벡터가 아니라고 하고서, 영벡터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 조건을 주었으니 당연히 이상한 문제일 수밖에. 애초에, "영벡터가 아닌"이란 구절을 빼고,
을 증명하라고 하였으면 괜찮았을 것을, 마지막 순간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수학적으로는, 원래 문제에 대해 "조건을 만족하는 세 벡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명제 자체는 참"이라고 할 수는 있다. 이것은 "p이면 q이다"라는 명제에서, p가 거짓이면 q의 참 거짓에 상관없이 전체 명제는 참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명제는 보통 vacuously true라고 부른다. "공허한 참", 말은 맞지만,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수학적으로야 아무리 옳다 쳐도, 대입 시험으로는 크게 부적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단 이런 문제를 출제했다는 것은 성균관 대학의 잘못이다. 김명호 교수의 지적도 분명히 옳고.
세상은 어떻게 명백한 오류를 지적한 당사자가 불이익을 당하느냐고 시끄럽다. 김명호 교수가 재임용에 탈락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알 수가 없다. 그가 정말로 교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하였는지, 아니면 성균관 대학이 치부를 감추기 위해 뛰어난 인재를 박해하였는지는 그곳에 있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 수학 문제를 수학적으로 다루는 데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재임용에 탈락한 김명호 교수가 재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대한수학회와 고등과학원에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요청하였다. 대한수학회는 그렇다쳐도 고등과학원에 의뢰한 건 좀 이상해 보인다. 고등과학원은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를 하는 곳이지, 수학 문제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곳은 아니니까 말이다. 이름 때문에 무슨 고등법원 쯤 되는 곳으로 생각한 것이라면, 애매모호한 법조문을 대법원이라는 권위에 의존하는 법조계다운 생각이긴 하다. 대한수학회와 수학교육 관련 학회에 의견을 구하는 게 적절했을 것을.
아무튼 대한수학회와 고등과학원은 "한 대학의 재임용과 관련된 문제는 검토할 강제성이 없다"라는 답변을 제출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세간의 주목을 끌고,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어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대한수학회는 왜 "답할 수 없다"고 하였을까? 당시 대한수학회장과 여러 이사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분들이 문제에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을 터. 대한수학회가 한 대학의 "운영"에 관여하는 것은 분명히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수학"에 대해서는 분명한 태도를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법원에서 대한수학회에 의뢰하였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설마하니 "김명호 교수를 복직시키는 게 옳을까요?"하고 물었을 리는 없을 것이고, 김명호 교수의 지적이 타당한지에 대해서 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학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답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이 사건은 겉으로는 수학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학적인 사건과 정치적인 사건이 뒤얽혀 있어 대한수학회로서는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처음부터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설프게 중립을 지키려다 상황이 더 복잡해져 버렸다. 정치적인 면만 생각하면 이 사건에 아예 관여하지 않는 쪽이 아마도 정답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 것을 생각하면 이 정답은 참으로 vacuous truth, 아무 쓸모 없는 정답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