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1권, 즉위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5월 22일(임진) 다섯 번째 기사인 "호조의 산학 산원을 산학 계사로, 이산을 초산으로, 이산을 이성으로 고치다"이다.
○改戶曹算學算員爲籌學計士, 改 理山 爲 楚山 , 改 尼山 爲 尼城 , 以御名音同也。
호조의 산학 산원(算學算員)을 산학 계사(算學計士)로, 이산(理山) 은 초산(楚山) 으로, 이산(尼山) 은 이성(尼城) 으로 고쳤으니, 발음이 어명(御名)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조의 이름은 드라마 덕분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산(李祘). 피휘를 하다 보니 "산"이 들어가는 이름이 여럿 바뀌었는데, 호조의 산학산원(算學算員)도 명칭이 바뀌었다는 내용이다. 재미있게도 祘은 셈한다는 뜻이니 사실 祘=算인 셈이다. 피휘 방법을 보면 참 기발한 변형이 많은데, 지금이 정조 시대라면 "이산(離散) 수학"은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궁금하다.
위의 기사에 대한 국역을 보면 "산학"의 算은 그대로 두고 "산원"의 算만 計로 바뀌었다. 좀 이상하다 싶어 원문을 보니, "산학"은 "주학(籌學)"으로 바뀌었다. 글자가 복잡하고 算이 반복되어 나오는 바람에 잠깐 헷갈린 듯.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算員"은 "計士"로 바꾸면서, "算學"은 "計學"이 아닌 "籌學"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당시 대부분의 계산을 산가지(籌)로 했기에 이런 명칭이 붙지 않았나 싶다.
원본이미지에는 산원(算員)이 算貟으로 되어 있는데, 지난 번 세조 실록의 正貟에서와 같은 글자이다. 중국인들 말로는 貟=負라더니, 貟가 負와 員 양쪽으로 쓰인다는 건지, 아니면 세월이 흐르면서 바뀐 것인지 모르겠다.
문제의 기사는 세조 20권,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6월 16일(신유) 첫 번째 기사로, "이조에서 역산 생도를 권려하고 징계하는 일의 개선책에 대해 따르다"라는 내용이다. 읽다보니 너댓 군데 어색한 번역과 주(註)가 보여, 정정 요청을 했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최근에 수정 사항이 반영된 것을 확인하였는데, 평방근과 입방근만 제곱근과 세제곱근으로 고쳤고 나머지는 그대로다. 다른 부분은 그렇다 쳐도 다음 부분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역산 제조(曆算提調)에게 내리신 단자(單子)안에, ‘ 정통(正統) 13년 정월 23일에 역산 생도(曆算生徒)에게 권려(勸勵)하고 징계(懲戒)하는 법(法)을 전지(傳旨)하였으나, 자못 미진한 점이 있다.’ 하므로, 지금 다시 마련하여서 아룁니다. 1. 산법(算法)은 육례(六藝)의 하나를 차지하나, 주(周)나라 빈객(賓客)이 국자(國子)를 능히 가르친 이래로 역대(歷代)에서 그대로 답습(踏襲)하여 과(科)를 설치하여 선비를 취(取)하였고, 위(魏)나라 · 당(唐)나라 연간에는 산학(算學)이 더욱 전일(專一)하여 유휘(劉徽) 와 같이 《구장(九章)》 에 주(註)를 달고 《중차(重差)》 를 속찬(續撰)하고, 순풍(淳風) 이 《십경(十經)》 을 주해(注解)하고 《보문(補問)》 을 자세히 설명하니, 널리 종합되고 정밀하고 자세하여져 한때의 독보적(獨步的)인 존재였습니다. 그후 과목(科目)이 이미 폐지되었고 산법(算法)을 전함이 드물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동방(東方)은 멀리 바닷가에 있어서 이미 산서(算書)를 구하지도 못하였으며, 누가 능히 산법(算法)을 알지 못하는데 또 어찌 능히 역법(曆法)을 알겠습니까? 오로지 우리 세종(世宗) 께서 역법(曆法)의 밝지 못함을 탄식하고 생각하시어 역산(曆算)의 책(冊)을 널리 구하였는데, 다행히 《대명력(大明曆)》 · 《회회력(回回曆)》 · 《수시력(授時曆)》 · 《통궤(通軌)》 와 《계몽(啓蒙)》 · 《양휘전집(揚輝全集)》 · 《첩용구장(捷用九章)》 등의 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서운관(書雲觀)·습산국(習算局)·산학 중감(算學重監) 등에서 한 사람도 이를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산법 교정소(校正所)를 두고 문신(文臣) 3, 4인과 산학인(算學人) 등에게 명하여 먼저 산법(算法)을 익힌 뒤에야 역법(曆法)을 추보(推步)하여 구하게 하였더니 수년 안에 산서(算書)와 역경(曆經)을 모두 능히 통달하였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후세(後世)에 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또 역산소(曆算所)를 설치하고 훈도(訓導) 3인과 학관(學官) 10인이 산서(算書)와 역경(曆經)을 항상 익히게 하고, 매일 장부(帳簿)에 적어서 열흘마다 취재(取才)하여 그 근만(勤慢)을 상고하여 부지런한 자를 권장하고 게으른 자를 징계하여 학업(學業)을 연마하게 하였기 때문에 산법(算法)을 아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왔습니다. 저 삼사(三司)의 사람들은 승제법(乘除法)을 조잡하게 익힐 뿐이요, 입방개법(立方開法)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어찌 3승방(三乘方)·4승방(四乘方)을 능하게 알아서 9승방(九乘方)의 법과 저 방정(方程)·정원·개방(開方)·석쇄(釋鎖)·도고(度高)·측심(測深)·중표(重表)·누구(累矩)·3망(三望)·4망(四望)·구고(句股)·중차(重差)의 법에 이르겠습니까? 역산 학관(曆算學官)은 비단 산서(算書)뿐만 아니라 역경(曆經)에도 또한 능히 익숙하고 겸하여 통달하였으나, 삼사(三司) 사람들의 학업(學業)은 맡은 바가 가볍지 아니한데, 만약 역산소(曆算所)가 없었다면 우리 나라에서 산법(算法)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학관(學官)이 오로지 도목(都目)에서 빠지므로 실망(失望)하여 잇달아서 면(免)할 기회를 엿보아 벼슬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또한 이에 소속하려고 하는 자가 없습니다. 신은 수년이 지나지 않아서 형세가 장차 폐하여 없어질까 두려우니, 원컨대 지금 다시 장려하고 권장하는 휼전(恤典)을 보이시어, 사람마다 흥기(興起)하여 전심(專心)으로 학업(學業)에 힘쓰도록 하여서 공효(功效)를 이루도록 하소서. 1. 학관(學官)이 6품(六品)으로 거관(巨官)한 뒤에 경외(京外)에서 재주에 따라 서용(敍用)하는 일은 이미 일찍이 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천거(薦擧)하는 길이 없기 때문에 산법(算法)을 통달하고 재주가 쓸 만한 자가 거관(去官)한 뒤에는 즉시 학업을 폐하여 버리니, 법을 세운 본의(本意)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이미 일찍이 거관(去官)한 사람과 금후로 거관(去官)하는 사람 가운데 만약 학업에 부지런하고, 삼가서 일하는 바가 보다 뛰어나 동반(東班)에 쓸 만한 자는 의서(醫書)를 습독(習讀)한 예에 의하여 현관(顯官)으로 추천(推薦) 제수(除授)하소서. 1. 역산소(曆算所)의 18인 안에 오직 2체아(遞兒)뿐이므로 병(病)으로 3일 빠지면 1통(通)을 깎아내리고, 까닭없이 1일 빠지면 1통(通)을 깎아내리고, 통(通)이 50이 차지 않으면 서용(敍用)하지 않기 때문에 몇년 동안 도목(都目)에 빠져 침체합니다. 금후로는 통(通)이 40이상 차는 자는 가운데 그 가장 많은 2인을 구례(舊例)에 의하여 품등(品等)에 따라 가자(加資)하고, 그 직(職)에 준(准)하여 보충하여 임명하소서. 그 수직(受職)하는 자는 그 통(通)을 깎아내리되, 40여 통(通)은 아울러 후의 도목(都目)에서 계산하며, 병(病)이 든 자나 까닭없이 빠지는 자는 통(通)을 깎아내리고, 죄를 논하는 법을 구례(舊例)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역산 훈도(曆算訓導)는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파(罷)하여 가르치기에 부지런히 힘쓰지만, 30개월이 찬 뒤에야 서반직(西班職)을 제수하기 때문에 훈도(訓導) 등이 싫어하고 꺼려서 면(免)할 기회를 엿봅니다. 금후로 개만(箇滿)인 자는 제생원 훈도(濟生院訓導)의 예(例)에 의하여 동반(東班)에 등용하소서. 1. 의서(醫書)를 습독(習讀)하는 자는 삼의사(三醫司)에 궐원(闕員)이 있으면 품등(品等)에 따라 고하(高下)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체아(遞兒)를 차하(差下)하니, 외인(外人)은 보충하여 임명할 수가 없습니다. 역산소(曆算所)도 또한 서운관(書雲觀)의 소업(所業)을 겸임(兼任)하고, 또 서운관의 여러 역술자(曆術者)들이 매년 대양(大陽)·대음(大陰)·오성(五星)·사여(四餘)·현행력(見行曆)·교식(交食)·추산(推算) 때에 모두 역산(曆算)에 의하여 교정(校定)하니, 금후로는 서운관(書雲觀)에서 궐원(闕員)이 있으나 차례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어서 외관(外官)으로서 보충하여 임명할 때에는 의서(醫書)를 습독(習讀)한 예에 의하여 역산 훈도(曆算訓導)·학관(學官) 중에서 품등(品等)에 따라 고하(高下)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체아직(遞兒職)을 차하(差下)하소서. 위의 항목에서 학관(學官)들이 거관(去官)한 뒤에 서용(敍用)하는 것은, 청컨대 정통(正統) 13년 정월 일에 수교(受敎)한 것에 의하여 학업에 부지런하고 삼가서 일하는 바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동반(東班)으로 임용할 만한 자는 경외(京外)에서 재주에 따라서 서용(敍用)하고, 체아직(遞兒職)을 제수(除授)할 때에 통(通)의 수를 가감(加減)하는 일과 훈도(訓導)·학관(學官)을 품등에 따라 보충하여 임명하는 일은 단자(單子)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 4367]정원 : 아주 둥근 원형(圓形).
아래 원본 이미지에서 빨간 테두리를 두른 부분이다.
그림을 누르면 한자 울렁증이 더 심해질 수 있음.
원본 이미지에는 正貟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貟을 원래 글자인 員으로 입력하면서 圓의 오자로 처리해 놓았다. 그렇지만 당시 산학의 여러 가지 기법을 나열하고 있는 구절에서 난데없이 둥근 원형(正圓)이 나올 일은 없지 않은가?
실은 이것은 正圓도 正員도 아닌 正負로 고쳐야 한다. 정(正)은 양수, 부(負)는 음수를 뜻하는 것으로, 지금도 중국과 일본에서는 양수를 正數, 음수를 負數라 한다. 고대 중국 수학은 동시대 다른 문명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해 있었는데, 특히 양수와 음수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방정식을 풀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양수와 음수를 계산하는 기법을 정부술(正負術)이라 하였다. 그러니 正貟은 정부(正負) 또는 정부술(正負術)로 옮기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왜 안 고쳐 주냐고!)
@ 좀전에 고등과학원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물어 보았는데, 그 사람들 말로는 貟이 負의 古字라고 한다. 正貟를 가리키며 "I think that this was a typo."라고 하니, 보자마자 "positive and negative"라고 하면서, "That is not a typo. That character is an old form."이라고 한다. 貟은 員의 속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뜻밖의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니 박성원 기자도 한심하지만, 신동아 편집부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 아닐까 싶다. 작년 2007년 8월호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제로존 이론을 특종이라며 실어서 여러 과학자들을 피곤하게 만든 멍청이들이 학계의 지적에 대해 해명이랍시고 2007년 10월호에 썼던 글을 보면, 이런 생각이 확신으로 바뀐다.
우연의 일치인지 바람의 화원과 무한 도전에서 아홉 개의 점을 네 개의 직선으로 연결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두 프로그램 모두 이 문제를
고정 관념을 벗어나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 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
로 인식했던 게 아닌가 싶다. 생각해 보면 이런 관점에서는 꽤 적절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처음 풀어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각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점과 점만 연결하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다가 사각형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문제는 멋지게 해결된다.
바람의 화원
무한 도전
인간의 사고 방식이라는 게 비슷해서인지, 서양에서도 이 문제는 고정 관념을 벗어냐야만 풀 수 있는 문제의 대표격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에서 유래해서, 고정 관념을 벗어난 창의적 사고를 outside the box thinking이라고 부른다. 출판사 Random House의 웹사이트에서는 The Mavens' Word of the Day에서 이 어구를 소개하고 있다.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은 직선을 길게 그으면 세 개만으로도 아홉 개의 점을 지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무한 어쩌고 하며 이어지는 엉성한 설명은 작가가 무지한 탓) 아마도 작가는 김홍도보다도 신윤복의 창의성이 더 뛰어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
너무 나간 작가님
지난 글에서도 썼지만, 이 문제는 모범 답안 외에도 온갖 풀이가 수도 없이 많이 나와 있다. 모범 답안이 아닌 색다른 답을 내는 것이 더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신윤복의 예를 생각해 보자. 정말로 신윤복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소유자여서 스승을 뛰어넘는 창의성을 지녔다면, 왜 처음부터 직선 세 개를 긋는 답을 내지 않았을까? 그가 김홍도의 풀이에 대해 색다른 답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김홍도의 풀이를 통해 "상자 밖에서 생각하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문제를 풀지 못하다가, 스승의 풀이를 보고서, "오, 그렇군. 그럼 이런 것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오, 그렇군"에서 일종의 격발이 일어나 "그럼 이런 것도"라는 생각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상자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렵지, 일단 빠져나간 상자 바깥에서 더 멀리 나가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편, 처음부터 직선 세 개로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더 깔끔한 풀이를 찾아낼 수 있다. 문제의 의도가 뻔한데, 점을 크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길게 직선을 긋는 것은 그 풀이를 생각한 사람에게도 다소 억지스러운 풀이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세 개로 되는데도 네 개로 해결하라고 하면 의도에 충실한 풀이를 찾으려는 게 자연스럽고, 한번 바깥으로 나가는 사고를 한 사람이라면 모범 답안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무한 도전의 정형돈이 바로 그 예가 될 것이다.
무한 도전에서 정형돈은 처음에 직선 세 개로 해결하는 것과 비슷한 풀이를 내었다가 나중에 정답을 맞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정형돈이 예전에 이 문제의 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바깥으로 나가는 풀이에 감탄은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풀이는 잊어버리고 "바깥으로 나간다"는 아이디어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잊어버리고 강렬하게 느꼈던 부분만 기억에 남는 것은 누구에게나 흔한 경험이다. 정형돈은 처음에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만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엉뚱한 답을 내었지만, 곧 정답에 도달한다. 무한 도전을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정형돈의 첫 번째 풀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정답에 가까이 가지 않았을까 싶다.
혹시 정답을 알면서 쇼?
직선 세 개를 길게 긋는다거나, 종이를 접는다거나, 입체도형을 이용한다거나 하는 풀이 모두 나름대로 재치있고 재미있는 생각이다. 남들이 하지 못한 독특한 생각을 창의적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풀이들은 대단히 창의적이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지극히 피상적이며, 사고의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만 주목하는 반쪽짜리일 뿐이다.
창의적인 생각은 단순히 "남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이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이 세상에는 60억 개의 창의적인 생각이 파편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모범 답안이
"상자에 갇혀 있다 --> 상자 밖으로 나간다"
인 반면 다른 풀이들은
"상자 밖에 있다 --> 더 멀리 간다"
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창의적인지 분명하다. 퍼즐뿐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해 보이더라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아이디어가 진정으로 창의적인 것이다.